끝내 푸르지 못했다
2025. 8. 23.

사랑은 어렵다. 낡아빠진 과방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묵여청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 대부분의 글은 사랑을 주제로 한다. 시, 노래 가사, 소설, 에세이, 조각글, 편지, 휴대폰 문자. 그 종류가 무엇이 되었든 글자들이 나란히 줄 서 있다면 그 내용엔 사랑 한 조각이 꼭 담겨있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은 참 많고 복잡할 텐데 굳이 그 감정에 집착하는 이유는 뭐지. 묵묵히 머리를 굴려봐도 빈도가 보여주는 가치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청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분명 그 애를 좋아했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응. 연락 오면 들떠? 응. 안 보고 싶으면 보고 싶어? 가끔은. 체크리스트처럼 이어지는 친구 놈의 질문에도 그럭저럭 통과할 만큼 - 확실히 썩 만족한 표정은 아니었다. 마지막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니까. - 일반적인 잣대에도 부합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오늘 그 애에게 들은 말은 몇 년 전 이맘때쯤 들은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너를 사랑해. 그래서 힘들어. 너는 날 사랑하지 않잖아.

 

 날 사랑하긴 해? 이게 오늘 들은 대사였던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어도 잡히지 않는 가닥에 청은 작은 숨을 내쉬며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다시 매끈해진 이마가 천장을 마주한다.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한데. 누가 찬 거냐는 말에 무어라 대답할 수도 없는 애매한 이별인 것은 매한가지다. 누가 봐도 상처받은 것은 그쪽인데, 사실은 나도 미미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도 똑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는 것까지도.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상처니까.

 

  글을 읽고, 읽고, 읽을수록 깨달았다. 내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감정 하나에 목을 매고 그 사람 하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그 열정이란 제게 존재하지 않았다. 건조하고 감정이 담겨있지 않다는 평가도 이젠 지겨웠다. 아니, 넌덜머리가 났다. 사랑을 알았다면 내 삶이 조금은 더 편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의미 없는 한탄이다. 어차피 나는 또 이런 어디중간하고 미지근한 연애를 반복할 것이다.

 

 온몸에 힘을 빼자 허벅지에 두었던 손이 그 아래로 떨어진다. 툭, 소파의 푹신함이 아닌 딱딱한 무언가가 피부를 건드린다. 뭐지, 느릿하게 눈을 떠 아래를 바라보자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과 과방에 책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청은 손에 거슬리는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본능과도 같은 일이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상태가 아님에도 청은 본능적으로, 할 일 없이 정체해 있던 다른 한 손을 들어 가볍게 책을 훑는다. 촤르륵 소리를 내며 흩어지는 페이지는 한순간에 멈추었다. 연속성이 끊어진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엄지손가락을 좀 더 뒤로 옮겼다. 그래도 끈질기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글자를 읽어내렸다.

 

 

그대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겨울의 강을 바라보았네

죽은 발자국이 함박눈처럼 희게 쏟아지던 밤

- <한강의 새>, 류나인

 

 

 흐렸던 시선이 자꾸만 검은 글자를 좇았다.  이 짧은 글을 읽고, 읽고, 작가의 이름에 시선이 닿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첫 글자를 읽는다. 톡, 톡. 책 표지 근처에 닿았던 손이 움직이며 작은 소리를 냈다. 시작은 타의였으나 - 누가 시킨 진 모르지만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 그 끝은 분명히 자의다. 차갑게 식었던 가슴이 천천히 벅차올랐다. 좋은 글을 읽었을 때 떨리는 심장. 이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건가.

 

머물던 활자에서 겨우 시선을 떼어낸 청은 이어지는 정보를 읽어나갔다. <한강의 새>로 2013년 시 부문 등단. <죽은 여름>으로 소설가 등단. 시선은 찬찬히, 그리고 차례로 아래를 향했다. 쪽 끄트머리 자그맣게 적힌 꼬리말.

 

... 과 선배네.

 

A 대학교 문예창작과 1X 학번 문집. 예사로 여겼던 책을 이제서야 읽어본 것이다. 이런 작가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읽어볼걸. 결국 공허해질 사랑놀음을 할 시간에 그의 글을 하나라도 읽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 아, 아니지. 그도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 글이라고 설명하는 것 아닐까. 그의 다른 작품을 찾으러 분주하게 움직이던 눈동자와 시선은 그렇게 일순 멈추었다. 

 

만나 보고 싶다.

 

청은 고개를 뒤로 꺾어 소파 위에 뒤통수를 뉘었다. 정수리가 벽에 닿아 딱딱한 그것을 가감 없이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후우. 탄식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이 흘렀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거슬려 눈꺼풀을 감고 익숙한 암흑을 만들어낸다.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을 얼굴 위에다 덮었다. 흐르는 입김은 종잇장에 닿았다가 다시 제 피부 위로 드리웠다. 

속이 답답했다. 그조차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찌할까. 나는 결국 닿을 수 없는 곳을 열망하며 결핍된 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일까. 어차피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청靑은 그저, 푸르러지고 싶었다.

 

 

 

끝내 푸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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